김기진은 1920년대 한국 근대비평의 기초를 개척한 비평가이자, 다수의 문학작품을 발표한 문학가이다.
영동공립보통학교에 재학 중,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 입학,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으며, 박영희, 김복진 등과 파스큘라를 결성하고,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이론적, 실질적 지도자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35년 카프 2차 검거 때 해산계를 제출, 스스로 경향문학의 한 시대를 마감했다.
박영희와 여러 차례 논쟁을 벌였으며, 이 일을 두고 “프로문학이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다.”라고 뼈아픈 진술을 남긴다.
1938년 창씨개명으로 자신과 문단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6 · 25때 인민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살아남았다. 이후 역사소설 발표, 신문사 주필 등으로 활동하다가 1985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자손들에게 써준 친필
김기진 작품활동
김기진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던 20~30년대는 우리 비평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시기였다. 1920년 동아일보에 시 [가련아]를 발표한 뒤, 주로[개벽]에 글을 발표했다.
이 잡지에 실린 작품으로 1923년 수필 [프로모나드 상티망탈], 시 [애련모사(愛戀慕思)], 평론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 등이 있으며, 같은 해[백조]에 시 [한 갈래의 길], [한 개의 불빛] 외에 4편의 시를 발표했다.
[한 개의 불빛]에서는 지식인과 가난한 사람들과의 동지애를 언급했다. 소설로는[개벽]에 [붉은 쥐](1924), [불이야! 불이야!](1925),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死)](1925), [몰락](1926) 등과 전문 삭제된 [Trick]을 발표했다.
[붉은 쥐]는 스스로가 처녀작으로 내세우는 소설로, 신경향파소설의 최초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본능의 복수](문예운동, 1926), [황원행 荒原行](동아일보, 1929), [봄이 오기 전](신가정, 1934), [심야의 태양](동아일보, 1934), 「통일천하」(동아일보, 1954) 등이 있다.
그는 문단을 진단(診斷)하는 평론을 많이 썼는데, 1920년대 초반[개벽]에 프로 문학의 씨앗을 뿌리는 역할을 한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 [또 다시 클라르테에 대하여](1923) 등과 [마음의 폐허](1923), [지배계급 교화, 피지배계급 교화](1924), [금일의 문학, 명일의 문학](1924) 등을 발표했다.
1920~30년대 월평(月評)과 현장 비평을 활발히 전개했으며, 문단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망한 평론도 여러 편 발표했다. 6 · 25 이후에는 [통일천하](1954~1955), [군웅](1955~1956) 등의 역사 소설을 쓰기도 했다.